[첨단 헬로티]
이제까지 러시아 제조산업은 추웠다. 글로벌 선진국, 개발도상국들이 낡은 제조업을 갈아엎고 있을 때 러시아는 자원과 방위산업 기술에만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의 제조업이 따뜻해질 기미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는 원천기술을 활용해 산업 수준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15년에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국가기술 혁신 전략’을 수립했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에게 어떤 의미일까. 러시아가 제조산업을 혁신하고자 한다면 설비 증설이 반드시 필요하다. 역으로 말하면 한국 제조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아직은 수출/수입 측면에서 비중이 미약한 러시아지만 최근 추진되는 한·러 자유무역협정(FTA)과 앞으로 ‘제조산업 육성 정책’에 기반한 성장 가능성을 놓고 본다면 수출 길은 분명 넓어질 것이다.
지난 7월 9일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에서는 ‘제9회 예카테린부르크 국제산업전(INNOPROM 2018)’이 개최되었다. 한국은 동반국가관으로 참가해 105개 국내 기업이 부스를 마련하였다.
이 전시회에서 한국 기업은 많은 참관객들의 관심을 받았다. 러시아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한 경동나비엔 부스와 러시아에 200여대 가량 수출 실적이 있는 우진플라임이 대표적인 인기 부스였다.
또 이번 전시회에서 국내 건설중장비, 마찰용접기, 산업용 호스, 드론 등을 제작하는 우리 기업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현지 기업과 수출을 위한 4건의 MOU와 1건의 기술협력 MOU를 체결하였다.
이번 전시회의 성과는 아직 미미하다. 하지만 이제까지 시장 진출 국가로는 다소 생소했던 러시아에서 시장 진출의 가능성을 봤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크다.
러시아 시장 상황
세계 11위 경제 대국, 2억8,000만명의 거대 시장인 독립국가연합(CIS)의 중심.
러시아의 산업이 변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위기 이후인 2010년부터 신성장 동력 모색 및 현대화, 그리고 혁신을 우선으로 두는 산업 정책을 펼치며 기존 산업 구조를 탈바꿈 시키고 있다. 그리고 2014년 대러 제재 이후부터는 자국 산업의 육성과 산업다각화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러한 흐름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러시아 경기 회복이 확연해지면서 기계설비 소비 증가로 기계 및 부품 수입이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 산업정책의 핵심은 자원의존도 탈피를 위한 산업다각화, 낡은 생산 시스템의 현대화 및 고도화, 첨단기술 활용에 의한 신성장 동력 확보, 지역적 특성에 따른 산업공간의 재편, 영토적 광활함을 활용한 글로벌 공급 사슬망 구축 및 러시아 국내 산업 거점망 연결 등으로 축약될 수 있다.
특히 우선순위를 두는 산업 분야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6년만 하더라도 우주항공, 교통, 항공기 제작, 생명과학, 나노 기술 등에 우선순위를 두었는데, 2014년 이후부터는 엔지니어링, 금속가공, 목재, 공작기계, 의료기술, 석유화학, 자동차, 경공업, 광학기술 등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있는 분야에 집중 투자를 하겠다는 전략으로 탈바꿈 한 것이다.
▲ 제9회 예카테린부르크 국제산업전 ‘INNOPROM 2018’의 동반국가관 전경
한국과 러시아의 수출입 및 투자 현황
한국과 러시아의 무역 규모는 크지 않다. 관세청의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의 러시아 수출금액은 69억661만 달러이고, 수입금액은 120억3,953만 달러이다. 러시아의 수입 국가별 순위로 보면 한국은 17위다.
반대로 러시아 측면에서는 한국이 수입국 8위(1위 중국, 2위 독일)다. 러시아의 최대 수출 대상국 역시 중국(전체 10.8%)이며 네덜란드(9.95%), 독일(7.19%), 터키(5.23%), 벨라루스(5.20%) 순이다. 한국(3.44%)은 8위다.
사실 한국과의 무역량은 지난 몇 년간 부침을 겪었다. 2000년 한국의 러시아 수출은 8억 달러 규모에서 2010년 77억 달러 규모로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2011년부터는 10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이러한 흐름을 2014년까지 이어갔다.
하지만 2014년 러시아 재제 이후 급격히 감소하였다. 2015년 러시아 수출액은 전년도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약 47억 달러였다. 지난 해 들어서야 69억 달러로 올랐으나 예전과 같은 성장세 회복 흐름은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산업정책 및 산업공간의 변화와 한·러 산업협력’ 논문에서는, 한·러 양국 간 무역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던 과거에는 한국 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중국 제품의 품질이 낮아 경제 회복기에 우리나라 제품이 선호되었으나 오늘날에는 한국과 중국 기업 간 격차가 많이 줄어든 상황이어서 효과적인 진출 전략이 마련되지 않으면 빠른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품목별 수출입 동향을 보면 대러 수출 1,2위 품목인 승용차 및 차량부품 수출 비중이 약 40%이다. 승용차 및 차량부품 다음으로는 선박 및 해상구조물, 합성수지, 철 구조물, 불도저(건설중장비), 음료 및 주류, 가구 및 조명기구, 내연기관, 금속주조 주형틀, 세탁기(생활가전) 순으로 수출 비중이 높다.
한국이 수입하는 제품은 원유와 나프타 등의 석유 제품과 천연가스, 유연탄, 무연탄 등 주요 에너지 자원에 집중되어 있다.
▲ 러시아의 주요 수입국 및 수입액 (단위: 백만 달러, %)
러시아 기계 시장, 그리고 한국과의 거래량
러시아의 기계산업은 상당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이 아직은 부족한 상태다. 특히 공작기계의 경우 수입 공작기계의 비중이 전체의 90%에 달한다. 더욱이 공작기계 대부분(20년 이상 가동된 공작기계가 50%를 차지) 노후화 되어있는 상황이다.
수입하는 주요 수입 공작기계는 지멘스, 화낙, 야마자키 마작, 트럼프 등 독일을 비롯한 유럽과 일본 제품이 주를 이룬다.
슈나이더(Schneider)의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의 생산장비 및 설비 수입 의존도는 2014년 기준 90% 가량 된다. 품목별로 보면 CNC 선반은 90%, 드릴링 머신은 80%, 그라인딩 머신 97%, 산업용 로봇 95%, 모터 100%다. 러시아는 이 같은 수입 의존도를 2020년까지 60% 가량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제 한국과의 기계류 무역 현황을 살펴보자. 2017년 기준 한국이 러시아에 수출한 기계산업(조선 제외) 규모는 43억4,900만 달러다. 한국의 2017년 전체 기계산업 수출액은 1,253억 달러로, 러시아 수출은 3.5% 수준에 그친다. 중국과 미국은 제쳐두고라도 베트남, 중동, 중남미 등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볼 부분도 있다. 최근 3년 간 기계산업 수출액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2017년의 성장률은 2016년과 비교해 약 40% 성장률을 보였다. 이 같은 성장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시장 관계자들은 전망하고 있다.
▲ 러시아 산업은 전통적으로 방위산업과 자원에 편중돼 있었다.
▲ 한국의 러시아 수출입 실적(2000 ~ 2018년 8월) (단위 : 천 달러(USD 1,000))
한국에게 주어지는 러시아의 기회 요소
앞서 ‘러시아 시장 상황’에서 언급한대로 러시아는 ‘제조산업 육성 정책’에 기반해 산업다각화, 시스템의 현대화 및 고도화, 첨단기술 도입을 통한 신성장동력 확보 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추진 전략은 수입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수입대체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수입대체 프로그램은 러시아 시장 진출과 상반되기는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우선 기계산업 인프라를 구축하고 첨단 기술을 도입해야 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에게는 러시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인 것이다.
한국은 어떻게 러시아 시장이 제공한 ‘기회의 시간’을 써야 할까.
현재 러시아의 최대 수입 품목은 운송과 화학 분야이고 수입의존도가 가장 높은 부문은 항공, 공작기계, 식품가공기계, 중공업, 경공업, 전자산업, 제약 및 의료산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수입의존도가 높은 러시아 산업 부문에서 운송 장비를 제외한 나머지 한국 품목은 대부분 러시아 수입시장 점유율이 5% 이하이다. 따라서 수입의존도가 높은 분야를 집중 공략하되 러시아 시장 특성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최근 러시아 정부는 수입의존도가 높은 산업 분야에 대한 투자 진출 확대를 촉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의 시장 진출 전략에 힘을 실어준다.
▲ 러시아 노보로시스크 무역항
▲ 한·러 기계류 무역 현황 (단위:백만 달러)
양날의 검 ‘수입대체 프로그램’
수입대체 프로그램은 단순히 러시아 자국의 기술력 증진과 제조산업 인프라 구축을 통한 생산 능력 확보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국 기업 및 산업 성장을 위해 외국 투자기업 진출에 대한 제재도 포함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국산품 인정 기준을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러시아 산업정책 및 산업공간의 변화와 한·러 산업협력’ 논문에서는 수입대체 프로그램이 본격 가동되면 한국 제품의 B2B사업도 축소될 수 있고, 현지 생산 제품도 필수 공정 규정 위반으로 국산품 인정을 받지 못하여 러시아 정부의 공공조달에 참여할 수 없게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이러한 위협 요인은 러시아의 수입대체 산업 육성정책이 EEU(유라시아 경제연합) 회원국 전체로 확대되면서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수입대체 프로그램은 단기간에 종결되는 정책은 아니다. 현재 러시아의 경제 위기 극복, 산업다각화라는 여러 요인에 따른 정책이므로 장기적으로 추진되며, 보다 체계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수입대체 프로그램에 규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정부는 수입대체산업 육성 분야를 선정하여 대규모로 지원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이 정책은 육성 분야 범위 안에서 R&D 비용, 운영 자금 및 생산 활동 금융에 대한 이자에 한해서는 보조금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때문에 까다롭기는 하지만 러시아 내 생산 라인 및 부품 조달 등에서 국산품 인정 범위에만 들면 앞서 정책에 따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 러시아의 전략적 가치
▲ 러시아 수입대체 정책의 배경과 정책 기대 효과
러시아 무역 비즈니스 팁 -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
러시아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쉽게 성사될 것 같은 일이라도 막상 닥치면 안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들이 성사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러시아의 특성을 반영한다.
- 상담은 사장과 직접
대다수 국가에서 그렇듯 메일이나 팩스, 전화 상으로 연락할 경우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국 포털사이트 메일로 보낼 경우 스팸처리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대면 상담이 가장 우선시돼야 하며, 만날 때는 사장과 직접 협의하는 것이 좋다. 러시아 회사는 의사결정이 사장에 집중돼 있어서다.
- 러시아 수출 시 동일 가격 정책 필요
러시아 바이어들은 해외 수출업체에 가격표를 제시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거래 당사자 외에는 가격 노출을 하지 않는데, 이 부분이 조율되지 않아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러시아 업체들은 유료 DB를 통해 각 업체의 통관 수입 통계를 자주 확인한다. 즉, 해당 DB를 통해 러시아 바이어들이 해외 제조업체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수입 가격으로 수입 중인지 통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동일 품목에 대한 수입가격 확인이 실시간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조금만 가격 차이가 나도 지속적인 거래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러시아 시장으로 수출할 때에는 동일 가격 정책으로 제품을 제공하고 구체적인 주문량에 대응할 수 있는 가격표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 독점권 요구 시 면밀하게 검토해야
많은 러시아 업체들은 수입 독점권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독점권은 제조업체와 대리점 간의 합의이며 이에 따라 바이어는 일정한 지역에서 일정한 시기 동안 독점으로 해당 제조업체의 제품을 수입하는 것이다. 동시에 독점 대리점은 연간 일정한 제품량을 주문할 의무가 있다. 대부분의 한국 수출업체들이 이 독점권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수출 계약 단계에서 진전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독점권이 무조건 안 좋은 것은 아니다. 독점권의 장점은 현지 마케팅 용이, 통제 용이, 소비자 접근성 용이, 수출대금 확보 용이 등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 대리점 신용조사를 사전에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 독점권의 단점은 대리점 의존도가 높고, 리스크 관리가 어렵다는 것이다. 거래 시 장점과 단점을 잘 판단하여 독점권 동의를 결정해야 한다.
- 바이어 통관 능력은 꼭 검증
러시아는 통관이 어렵기로 가장 악명 높은 국가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바이어들의 경우에도 자본력이 취약하거나, 소규모 업체일 경우에는 통관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가끔씩 통관을 수월히 할 수 있는 큰 바이어가 있을 수 있으며, 통관은 문제없다고 큰소리치는 바이어들이 있는데, 이에 현혹되지 말고 차근차근 바이어의 능력을 검증해야 한다.
통관 문제로 잠재력 있는 바이어를 놓칠 수 있는 경우, 상대적으로 통관이 수월한 블라디보스톡에서 통관하도록 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참조 문헌]
[1] KOTRA ‘2018 해외시장 진출 유망·부진 품목’
[2] KOTRA ‘무역관 르포 - 러시아에 어떻게 수출해야 할까’
[3] 이상준, 이대식 ‘러시아 산업정책 및 산업공간의 변화와 한·러 산업협력’
<본 기사는 [머신앤툴 2018년 10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